출판편집자_01_출판 편집자는 PM처럼 일한다
출판 편집자는 PM처럼 일한다
나는 4년 9개월 동안 출판 편집자로 일했다. 분야는 'IT 활용'이라는 비교적 특수한 영역이었다. 각종 IT 도구의 사용법부터 뉴미디어, AI처럼 빠르게 변하는 기술 생태계까지—그 안의 콘텐츠를 기반으로 '도서'라는 제품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건, 편집자가 단순히 책상 앞에서 문장을 다듬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현장에서 경험한 편집자의 일은 한 권의 책, 즉 하나의 제품(Product)을 책임지는 일이었다. 기획부터 저자 섭외, 협업팀 관리, 품질 관리, 출간 이후의 런칭과 마케팅까지. 용어만 다를 뿐, 당시 IT 업계에서 각광받던 프로덕트 매니저(PM)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그래서 IT 개발 문화를 접했을 때 애자일, 린 프로세스, 데브옵스, 회고 같은 개념이 낯설지 않았다. 내가 출판 편집자로서 고민하던 ‘좋은 책을 만드는 방식’과 결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기준이 없으면 품질도 없다
도서를 비롯해 제품의 품질은 어디서 결정될까? 나는 '합의된 기준'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팀에서 맡았던 주요 시리즈는 매출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가장 관리가 안 되는 영역이기도 했다. "원래 그래왔어"라는 저자의 관성, 이전 담당자들이 남긴 파편화된 문서와 구전. 그 위에서 작업을 이어가다 보니 원고 품질의 편차가 컸고, 결과물을 완성하기 위해 재작업과 커뮤니케이션 비용만 계속 늘어났다. 담당자들의 번아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래서 흩어져 있던 규칙을 모아 만든 ‘편집 통일안’이 중요했다. 스타일 가이드를 포함해, 팀이 지향해야 할 품질의 기준선을 명문화하는 것이다. 기준이 공유되면 불필요한 논쟁이 줄어든다. 소모적인 의사소통 비용을 줄이고, 그 에너지를 콘텐츠의 가치를 높이는 데 쓸 수 있다. IT로 치면 개발팀이 린터와 컨벤션을 정해 코드 퀄리티를 유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동료의 시간은 내 시간만큼 소중하다
혼자서 수백 페이지 원고의 완전무결함을 책임질 수는 없다. 그래서 출판은 보통 여러 단계의 리뷰를 거친다. 문제는 마감이 닥치거나 내 일이 급할수록, 다른 사람의 원고를 봐주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평사원이든 팀장이든 마찬가지다. 특히 팀장은 책임 범위가 넓어서 공력이 더 많이 든다. 이런 작은 병목이 쌓이면 곧바로 과부하로 이어진다.
팀의 인력 구성이 급격히 바뀌던 시기에, 팀장님을 돕기 위해 한 가지를 떠올렸다. 매뉴얼과 환경 설정을 포함한 ‘온보딩 가이드’를 만드는 일이었다. 일을 이렇게 하세요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어떤 시행착오를 피해야 하는가까지 맥락을 같이 전달하고 싶었다.
회사의 일은 이해관계가 얽힌 고맥락(high-context) 의사결정이 많다. 새 인력이 들어오면 그 맥락을 따라잡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나는 내 신입 시절을 거울 삼아, 신규 인원들이 부담 없이 질문할 수 있도록 디스코드를 적극 도입했다. 레거시 문서를 정리하고, 이메일/구두로 1:1로만 공유되던 정보를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공간에 남기는 방식으로 바꿨다. 일종의 Working in Public 문화를 도입한 셈이다.
의지보다 강한 것은 시스템이다
결국 고민이 깊어졌던 지점은 ‘시스템’이었다. 회사는 리스크 관리를 위해 체크리스트 도입을 장려했고, 협업 툴 도입도 시도했다. 개인의 의지나 기억력에 의존하지 않고 시스템으로 품질을 담보하려는 방향은 옳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시스템이 실무자에게 또 하나의 ‘할 일’로 느껴졌다는 점이다. 입력은 늘어났는데, 맥락이 없으니 불편함만 커졌다. 우리 팀은 디스코드 등을 활용해 최대한 린하게 움직여 보려 했지만, 조직 전체의 파이프라인이 바뀌지 않는 이상 한계가 분명했다.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왜 이렇게 불편해야 하지?"
이 질문은 내가 단순히 도구를 쓰는 사람에서, 도구를 만드는 사람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 계기였다.
"사람이 열심히 하는 걸로 버티지 말고, 일이 굴러가는 방식 자체를 더 낫게 만들 수 없을까?"
나는 편집자로서 책을 만들었다. 그런데 내 관심은 ‘원고를 더 잘 다듬는 방법’에만 있지 않았다. 좋은 결과물이 반복해서 나오게 만드는 방식, 즉 ‘일의 방식’에 관심이 있었다. 기준을 모아 통일안을 만들고, 온보딩 가이드를 정리하고, 정보가 특정 개인에게 고이지 않도록 공유 방식을 바꾸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들고 싶었던 건 거창한 제도가 아니라, 팀이 덜 헤매고 덜 지치면서도 같은 품질을 낼 수 있는 구조였다.
앞으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일하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출판이든 다른 제품이든, 좋은 결과물은 우연이 아니라 기준과 맥락, 그리고 조직이 합의한 방식 위에서 만들어진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있다. 앞으로의 나는 사람이 버티는 구조가 아니라, 일이 굴러가는 방식이 사람을 덜 지치게 만드는 구조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